최근 경북 영주에서 의미 있는 선언문이 나왔다. 선비의 고장, 소백산과 부석사, 소수서원이 자리한 이곳에서 인공지능(AI)의 방향과 책임을 묻는 「AI Technodao Manifesto 영주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이 선언문은 전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자 세계과학종교학술원(International Society for Science and Religion, ISSR) 종신펠로우인 필자가 주도한 작업으로, 한국 교회와 시민사회에 AI 시대의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
‘테크노다오(Technodao)’는 기술(technology)과 도(道, the Way)를 잇는 개념이다.
AI를 단순한 효율과 이윤의 도구로 보지 않고, 사람과 생명, 공동체를 위한 바른 길 위에 기술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AI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왔다. 챗봇, 생성형 AI, 자율주행, 의료·교육 AI 등은 이미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불안과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자리의 미래, 아동·청소년의 인격 형성과 신앙, 개인정보와 데이터 주권,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 등이 대표적인 쟁점이다.
영주선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AI 기술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한다. 그리고 “어떤 방향의 AI가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길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한국 교회와 시민사회 앞에 던진다.
영주선언이 제시하는 핵심 정신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고백이 흔들릴 수 없다. 기술의 기준은 속도와 효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 약자의 보호, 노동과 돌봄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둘째, 경쟁과 이윤보다 공공선을 우선해야 한다.현재의 AI 담론은 국가 간·기업 간 속도 경쟁에 치우쳐 있다. 영주선언은 여기에 균열을 내며, 돌봄·교육·의료·생태·기후위기 대응 등 공공선을 위한 AI를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성서가 말하는 이웃 사랑과 사회적 정의를 기술 영역에서 구현하려는 시도다.
셋째, 기술 종속을 넘어 책임 있는 ‘AI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플랫폼과 클라우드, 핵심 AI 인프라가 소수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 집중되는 현실에서 한국 사회는 쉽게 기술 의존과 종속의 위험에 노출된다.
영주선언이 말하는 ‘AI 주권’은 국수주의적 기술 자립 구호가 아니라, 사회가 기술을 분별하고 선택하며 통제할 수 있는 책임 능력을 뜻한다. 기술을 우상화하지 않고, 공동체의 윤리와 민주적 거버넌스 안에 두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동아시아의 도(道)와 기독교 신앙을 함께 불러낸다.영주선언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서구 중심 AI 담론에 일방적으로 편승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도(道) 사유와 선비정신,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함께 통합하려는 시도에 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도(道)의 통찰과, 인(仁)·의(義)·예(禮)·지(智)와 같은 공동체적 덕목은 AI 시대의 윤리 기준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道)을 따라 겸손·섬김·화해의 기술을 지향하자는 신학적 성찰이 더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AI 문제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삶, 그리고 문명 전환의 문제로 자리 잡는다.
앞으로 한국 교회와 시민사회는 어떤 AI를 개발·도입할 것인지, 교회와 가정, 교육 현장에서 어떤 디지털 환경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지, 선비 전통과 복음의 빛을 가지고 세계 AI 논의에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지에 대해 보다 진지한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AI Technodao Manifesto 영주선언」은 완성된 해답이라기보다, 이러한 질문을 함께 나누기 위한 출발점에 가깝다.
선비의 도시 영주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시도가, 한국 사회와 교회가 AI 시대의 바른 길, ‘테크노다오’의 길을 모색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약력
△세계과학종교학술원 종신펠로우 △전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
